한겨레의 과학 웹진 사이언스 온에 연재했던 김명호 님의 ‘만화가의 생물학 공방’ 을 사이언스북스에서 책으로 엮었다. 간단한 독후감.
책을 받아들고서 먼저 느낀 것은 ‘생각보다 크다’ 는 것이었다. 만화책이지만 세부사항을 꼼꼼히 그려야 하는 일러스트 성격의 그림들이 많기 때문에 일반 단행본보다는 큰 판형이 확실히 좋아 보인다. 표지에 고생대 판피어류가 그려져 있어서 더욱 반가웠다. 반짝거리는 홀로그램(?) 처리 덕분에 좀 더 고급스러워 보이면서 ‘무지개 물고기’ 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만화책은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많이 줄었겠지만, 과학을 주제로 한 만화책이라고 하면 깊이 있는 내용보다는 기껏해야 중고생 정도가 즐길 수 있는 내용을 가볍고 재미있게 다루었으리라고 짐작하기가 쉽다. 아무래도 어릴 때 한번쯤 접해봤을 가능성이 높은 ‘컬러과학만화학습’ 이라든가 ‘물리가 물렁물렁’ 류의 학습만화를 연상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김명호의 생물학 공방’ 은 이런 류의 만화들과 몇 가지 측면에서 구분된다. 하나는 ‘생물학 공방’ 이 이미 저자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자신보다 지적으로 낮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쉬운 학습을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서 설명해 주는, ‘학습을 목적으로 하는’ 만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어떤 주제에 흥미를 느낀 저자가 그 주제를 파고 들어 취재를 하고 그 결과를 책으로 엮어 발표하는 논픽션에 가깝다. 발로 뛰어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를 하는 대신 전문서적과 논문이 취재 대상이 되었고,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이 일반적인 글이 아니라 그림이 주가 되는 만화책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두번째는 그 덕분에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 하려는 (소위 dumbing down 이라고 하는) 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해당 주제에 대해 알게 된 내용을 최대한 전달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문에 보기에 따라서는 딱딱하게 설명하는 글이 많고 어렵게 느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매체가 만화라고 해서 항상 쉬운 내용만 전달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만화라고 해서 얕잡아 봤다가는 깊이 있는 내용에 놀라고, 이런 내용을 만화로 이렇게 전달할 수 있구나 하고 다시 한 번 놀라게 될 것이다.
내용은 다섯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심해, 2장 바다나리, 3장 유체골격, 4장 박쥐의 난제, 5장 투구게. 간단히 정리하면서 사심 가득한 고생물학 관련 코멘트를 덧붙여 보자.
1장은 심해 연구에 대한 과학사적 접근에 가깝다. 훔볼트에서 시작해 대서양 전신 케이블 공사,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해양 탐사 열풍에 이르기까지 과학자들이 심해에 대한 현재의 지식을 어떻게 쌓아왔는지를 보여준다.
2장 바다나리는 1장에서 파생된 내용으로 고생대부터 시작되는 바다나리의 진화사 및 생물학적 적응에 대한 내용이다. 이곳에서 소개한 기사들 중 바다나리와 관련된 것으로는 기생달팽이와 바다나리를 다룬 기사가 있었다.
3장은 꽤나 흥미로운 주제로 남자의 음경과 지렁이의 유체골격에 대한 내용이다. 발기부전의 공포(?)를 느끼는 중년 이상의 남성이라면 지렁이의 몸과 자신의 성기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원리를 한 번 성찰해봄직 하다.
4장은 박쥐의 반향정위 (echolocation) 를 다룬다. 이것 역시 박쥐가 초음파를 이용해 사물의 위치를 알아낸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삽질이 필요했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과학사 만화다. 박쥐 중에서는 날아다니면서 초음파를 사용하지 않고 땅 위에서 먹이를 찾는 종류도 있었으니.. 뉴질랜드의 ‘걷는’ 박쥐 화석 에 대한 기사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5장은 투구게와 혈액응고에 대한 것이다. 가장 길고, 가장 어렵다. 면역학, 혈액학, 그람 음성 세균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고생물학과 관련된 것이라면 투구게가 ‘살아있는 화석’ 이라고 불리며 수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매우 비슷한 겉모습을 유지했다는 것 정도. 투구게와 비슷하게 겉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은 현생 생물들 중 하나로 완족류인 린굴라 가 있다. 린굴라에 대한 기사에서도 설명하고 있지만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진화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투구게도 완족류도 수억 년 동안 계속해서 진화를 해온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생물이다. 투구게 혈액의 독특한 성질도 수억 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일테고.
이 다섯 편의 만화는 ‘사이언스 온’ 에 연재되었던 것이라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이었고, 책으로 엮었으니 뭐라도 보너스가 좀 들어가있겠지 생각했는데, 역시나 각 장마다 ‘작업 후기’ 가 딸려오고, 책의 앞과 뒤에 ‘머리말’ 과 ‘맺음말’ 아니, ‘머리만화’ 와 ‘맺음만화’ 가 붙어 있다. 왜 과학만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만화로 과학을 설명하는 것이 좋은지가 잘 드러나 있다. 나도 (가물에 콩 나듯이) 고생물학에 대한 글을 쓰는 입장에서, 그림이나 사진을 딱 보여주고 설명하면 금방 끝날 것을 글로 길게 풀어서 설명하려니 손가락이 꼬이고 단어가 꼬이고 어휘력과 묘사력의 부족을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책 마지막의 ‘맺음만화’ 를 보면서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내 말이 이 말이라니까! 진지하게 과학을 다룬 책답게 참고문헌 역시 충실하게 들어 있다. 색인이 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칭찬은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이제 지적질을… ;;
- p. 34: 챌린저 보고서에 실린 신종 생물의 학명에서 종명의 첫 글자가 모두 대문자로 되어 있다. 모두 소문자로 바꿔야 함. ex) Ipnops Murrayi -> Ipnops murrayi
- p. 42: 바다나리의 어원 설명에서 형태(form)를 뜻하는 edios 는 eidos 의 오기인 것 같다.
- (추후에 덧붙이겠습니다. 아직 꼼꼼히 다 읽지 못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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